한강 노벨문학상 강연 : 빛과 실로 엮은 작품세계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강연이 7일(현지시간) 스톡홀름에 있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한국어로 진행되었습니다. 한강의 강연을 그대로 받아 적어 단락을 나눠보았습니다. 빛과 실로 엮은 작품세계를 작품세계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글의 순서
빛과 실
빛과 실. 그 오후의 기억
작가 한강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히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다시 빛과 실
작가 한강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빛과 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습니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나무권이 담겨 있었습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습니다.
A5 크기의 갱지 5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2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습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6단의 계단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7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요?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요?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 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8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습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다른 날짜들이 시간순으로 기입되어 있었습니다. 8살 아이답게 천진하고 서툰 문장들 사이에서 4월의 날짜가 적힌 시 1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빛과 실. 그 오후의 기억
다음의 2행짜리 연들로 시작되는 시였습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40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그 책자를 만들던 오후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습니다.
볼펜 깍지를 끼운 몽당 연필과 지우개 가루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커다란 철제 스테이플러
곧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동안 자투리 종이들과 공책들과 문제집의 여백 일기장 여기저기에 끄적여 놓았던 시들을 줄여 모아두고 싶었던 마음도 이어 생각났습니다.
작가 한강
그 시집을 다 만들고 나자, 어째서인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던 마음도,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 두었습니다. 그 8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실 빛을 내는 실
그 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약 3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 지금도 좋아합니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습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에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됩니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습니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삽니다.
끝에 다다를 때, 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합니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채식주의자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래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해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습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해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해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밸런스 안입니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봅니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그 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갑니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바람이 분다 가라
정체와 이텔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 소설에서, 오랫동안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왔던 여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 힘을 다해 배로 기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 번째 장편소설인 히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갑니다.
히랍어 시간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말을 잃은 여자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각자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나아가다가 서로를 발견합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촉각적 순간들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손톱을 바싹 깎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을 향해, 이 소설은 느린 속력으로 전진합니다. 영혼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음의 소설을 상상했습니다.히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습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에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점까지 나는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9살이었습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12살이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습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습니다. 같은 책에 실려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1년 가까이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스케치를 하며, 1980년 5월 광주가 하나의 겹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날 오후였습니다. 어두워질 무렵 심장에 손을 얹고, 얼어붙은 묘지를 걸어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900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1달에 걸쳐 매일 9시간씩 읽어 완독했습니다. 이후 광주뿐 아니라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 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2개의 질문이 있습니다.
20대 중반의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입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습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교사의 일기를 읽었습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 에 남아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주는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습니다. 2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습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망자들에게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기에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었던 상무관에서 첫 장면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15살의 소년 동호가 시신들 위로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힙니다.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합니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입니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입니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옵니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됩니다.
소년이 온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온 고통이었습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같은 해 6월에 꿈을 꾸었습니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이었습니다. 벌판 가득 수천 수만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고, 하나하나의 나무 뒤쪽마다 무덤의 봉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에 물이 밟혀 뒤를 돌아보자,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에서부터 바다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곳에다 이 무덤들을 썼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아래쪽 무덤들의 뼈들은 모두 쓸려가 버린 것 아닐까?
위쪽 무덤들의 뼈들이라도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지금.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에게는 삽도 없는데. 벌써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 아직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이 꿈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꿈을 기록한 뒤에는 이것이 다음 소설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소설일지 아직 알지 못한 채, 그 꿈에서 뻗어나갈 법한 몇 개의 이야기를 앞머리만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2017년 12월부터 2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셋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길을 걷는 동안, 소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며,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잔혹한 세부들을 응시하며, 최대한 절제하며 써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것은, 검은 나무들과 밀려오는 바다의 꿈을 꾼 아침으로부터 약 7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습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1부의 여정이 화자인 경하가 서울에서부터 제주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 집까지 1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뚫고 가는 횡의 길이라면,
2부는 그녀와 인선이 함께 인간의 밤 아래로, 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시간으로, 심해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의 길입니다.
마지막 3부에서 두 사람이 그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밝힙니다. 친구인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넘겼다가 다시 건네받듯 함께 끌고 가는 소설이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입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1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감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로,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웃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다시 빛과 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3년이 흐른 지금, 아직 나는 다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책을 완성한 다음에 쓸 다른 소설도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힘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입니다.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입니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입니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내가 그렇게 멀리 가는 동안 비록 내가 썼으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 나의 책들도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입니다.
차창 밖으로 초록의 불꽃들이 타오르는 앰밸런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된 두 자매도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남자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있는 곧 언어를 되찾게 될 여자의 손가락도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내 언니와 끝까지 그 아기에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말했던 내 젊은 어머니도
내 감은 눈꺼풀들 속에 진한 오렌지 빛으로 고이던,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으로 나를 에워싸던 그 혼들은 얼마나 멀리 가게 될까요?
학살이 벌어진 모든 장소에서 압도적인 폭력이 쓸고 간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밝혀지는 작별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의 촛불은 어디까지 여행하게 될까요?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실을 타고. 지난해 1월 낡은 구두상자에서 찾아낸 중철 제본에서 1979년 4월의 나는 2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에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나의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습니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 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
그러나 2~3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나는 2014년 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질문했던 것일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에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에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움이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습니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합니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합니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 주었고, 연결 되어 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땡큐
작가 한강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스웨덴 한림원은 2024년 11월 10일,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의 작가 한강을 선정했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을 쓴 작가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올해 53살인 한 씨는 지난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한국 최초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했고, 2023년에는 제주 4.3사건의 비극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메디치상을 수상했습니다.
마치며 …
스톡홀름에 있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한국어로 진행된 30여분 간의 노벨문학상 강연을 빠짐없이 받아 적었습니다. 꽤 긴 글이라 읽기 쉽도록 단락을 나눴고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이 강연 자체가 또 하나의 작품입니다. 아래의 참고자료에 한강의 강연을 여러 차례 반복한 영상을 링크했고, 한강의 장편소설을 발표된 순서대로 나타내었습니다.
▶ 채식주의자
▶ 바람이 분다 가라
▶ 희랍어 시간
▶ 소년이 온다
▶ 작별하지 않는다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 받습니다.
참고자료
▶ MBCNEWS, [NOBEL PRIZES 2024] 한강의 노벨문학상 강연 – [끝까지LIVE] MBC뉴스 2024년 12월 08일